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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thers/두바이자료

[두바이] 통치자, CEO 쉐이크 모하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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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이크 모하메드의 두바이 성장모델  우리나라에도 적용 가능한 것인가?  (2007년  9월  6일)

UAE, 아니 중동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를 하나 떠올리라고 하면 단연 두바이가 생각날 것이다.

아니, 오히려 두바이가 하나의 국가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이 사막 한가운데 있는 두바이에 재계 고위급 인사들의 방문러시가 이어졌다.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전 서울시장, 한명숙 전총리, 오세훈 서울시장, 허남식 부산시장, 김문수 경기 도지사 등 이름만 들어도 무게가 느껴지는 유명 인사들이 모두 다녀갔다.

또한 삼성 이건희, CJ 이재현, SK 최태원 회장 등 대기업 CEO들도 한번씩 다녀가면서 두바이가 "창조적 리더쉽"을 배울 수 있는 관심의 도시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두바이를 경제, 건설, 관광, 등 국정운영 벤치마킹 대상으로 선정하고 언론에서도 수많은 관련기사를 싣고 있어 일반인들에게는 두바이는 최대 관심 도시로 떠오르고 있다.

쉐이크 모하메드의 리더쉽에 대해서 기사나 보고서를 보면 언제나 수식어가 붙는다.

"탁월한", "창조적", "혁신적", "성공적" 등의 수식어는 그의 리더쉽을 평가하는데 당연하다 못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역사 

두바이의 리더쉽 자리에 있었던 통치자들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1958년 10월 쉐이크 라시드는 공식적으로 두바이 Emirate의 통치자가 된다.

쉐이크 라시드는 병으로 쓰러져 큰 아들 쉐이크 막툼이 통치에 대한 일상업무를 대신하기 시작한 1981년까지 두바이를 이끌어 갔다.
1990년 10월 7일 , 쉐이크 라시드가 서거하고 나서 장남인 쉐이크 막툼이 그 바통을 이어 받았다.
그리고 쉐이크 막툼이 2006년 1월 서거하자 그의 동생 Sheikh Mohammed(쉐이크 모하메드 빈 라시드 알 막툼)가 두바이 통치자의 대를 이었다. 

혹자들은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버즈 알 아랍 (1994년), 버즈 두바이(2004년 착공), 인공섬 더 팜(2002년 소개)등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유명 프로젝트는 쉐이크 모하메드의 통치 하에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 전 통치자인 쉐이크 막툼 통치 하에 이루어낸 것인가?
현 두바이 통치자의 역할은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1995년 쉐이크 모하메드는 왕세자로 지명되었고 당시 두바이 국방장관직을 수행하던 쉐이크 모하메드는 형인 쉐이크 막툼과 함께 두바이를 이끌러 나갔다.

쉐이크 모하메드는 학창시절 영국에서 유학하였으며 상당히 총명하여 2번째 형인 쉐이크 함단을 제치고 두바이 왕세자와 두바이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

두바이 역사상 손아래 동생이 서열을 넘어 국정을 맡은 적도 처음이다.


                                  쉐이크 모하메드, 그는 누구인가?
 

   성     명  :  Mohammed bin Rashid Al Maktoum

               (알 막툼 가문, 라시드의 아들 모하메드)

   공식직함  :  두바이 통치자, UAE 부통령, 총리

   태     생  :  1949년 7월 22일생 (현재 58세)

   국     적  :  UAE

   정치성향  :  없음

   종     교  :  회교

   부     인  :  (1) Shiekha hind bint Maktoum bin Juma Al Maktoumb

                 (2) Princess Haya bind Al Hussein  

   자     녀  :  16명 (아들 7, 딸 9)

   사유자산  :  140억불

   최종학력  :  Bell Educational Trust School (대학교 과정)

    취    미  :  경마, 낙타경주, 시쓰기

    저     술 :   My Vision - Challenges in the Race for Excellence

통치자의 역할 - 비전을 제시한다!

일반적으로 국가를 이끌어 가는 사람을 대통령(Prsident)  혹은 총리 (Prime minister)라고

하고 도시를 이끌어 가는 사람을 시장(Mayor)이라고 한다.

하지만 UAE에서는 독립된 토후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을 Sheikh(발음 : 쉐이크, 의미 : 통치자)라고 한다.

통치자라는 의미에서부터 상당한 무게가 느껴진다.

각 토후국은 세습군주인 통치자 제도로 운영되고 Trucial States Council이 국회와 같은 역할을

하지만 각 토후국의 국정 운영에 대해서는 관여를 하지 않는다.

즉 토후국은 통치자가 왕권과 같이 1인 운영을 하는 시스템이다.

쉽게 말해서 각기 다른 정치성향을 지닌 정당이 없기 때문에 마찰이 없으며 신속한 의사결정이 가능하고 의사결정에서 실행까지의 전달이 빠르다.
  

통치자의 역할은 국민들에게 큰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토후국의 발전 비전(방향)을 제시하고 그 비전에 따라 세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 쉐이크 모하메드의 역할이다.
  

하지만 이러한 1인 국정 운영 시스템은 자칫 잘못하면 재앙을 불러올 수 도 있는 시스템이다.

올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비전을 제시하게 된다면 모든 시스템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를 통해서도 봐 왔듯이 비전이 없는 지도자 밑에서 망한 국가도 많이 있었다.

그러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쉐이크 모하메드의 비전은 순항 중이다.

쉐이크 모하메드의 기적

쉐이크 모하메드가 형인 쉐이크 막툼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며 본인이 두바이의 통치자가 된 이후 수많은 업적들이 그를 화려한 인물로 만들었다.

 

   

 개발 프로젝트로 인공섬 The  Palm 프로젝트, 세계섬 The World 프로젝트, 세계 최고층빌딩

버즈 두바이, 초호화 호텔 버즈 아랍, 디즈니랜드의 8 규모인 두바이랜드 수없이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두바이 랜드 미니워처

경제 개발 부문에서도 탁월한 리더쉽을 발휘했는데 무세금 정책고수, 제벨알리 프리존, DIFC, 인터넷 시티, 미디어시티, Knowledge 빌리지, 헬스케어 시티 등 프리존(외국인 지분 100% 허용 및 법인세 소득세 비과세 지역) 산업군 개발, 관광산업 육성 등을 통하여 세계 자본 흡수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쉐이크 모하메드의 지배 아래 두바이 GDP의 원유 의존도를 5.4%로 낮출 수 있는 기적을 이루어냈다. 

사막에서 알라신이 준 유일한 축복인 석유 자원이 부족한 국가가 살아 남기가 상당히 힘든 환경에서 

독자적인 수익 모델을 제시하여 성공을 이루어냈다. 

이러한 수익모델을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기적의 배경 

기적이 일어난 사실에는 의심이 없지만 크게 2가지 요소가 있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두바이는 쉐이크 모하메드 지도하에 성공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1. 시대적 배경 

     2. 환경적 배경  

   

시대적 배경에도 몇 가지 부분이 작용한다. 

첫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쉐이크 모하메드가 영국에서 유학을 할 수 잇엇던 배경이다. 

물론 학업이 사람의 리더쉽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부분은 아니지만 당시 개인 교습 만으로 학업을 

할 수 밖에 없는 왕족들에게 넓은 세계를 볼 수 있던 것은 굉장히 큰 혜택이자 훌륭한 리더쉽의 발판이 되었다. 

쉐이크 모하메드는 장남이 아니었다.  

아버지인 고 쉐이크 라시드의 세번째 아들로 1949년에 태어났다. 

그의 형이자 쉐이크 모하메드 이전의 통치자였던 쉐이크 막툼은 1943년 생이다. 

약 6년 터울이 있어 그리 큰 차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형은 국정운영에 상당한 시간을 빼앗겨 학업에 열중할 시간이 없었다. 

   

통  치  자 : 쉐이크 막툼  /   쉐이크 모하메드
출      생 : 1943  /   1949
학      업 : 개인교습  /   1966년  17세 영국유학 
통      치 : 1971-1979 (총리)  /  2006 - 현재 (통치)
 1990-2006 (통치)
 

고 쉐이크 막툼은 1971년부터 총리로써 역할을 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젊은 시절 국정운영 업무에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인 쉐이크 라시드가 몸이 불편하여 1981년 부터는 쉐이크 막툼이 일상업무를 할 만큼 바쁜 일상을 보냈다. 

즉, 학업을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을 뿐더러 학창시절 두바이 토후국이 그리 부유하지 않아 해외로 유학을 가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반면, 쉐이크 모하메드는 두바이에 석유가 발견된 1966년 곧바로 사촌(쉐이크 모하메드 빈 칼리파 알 막툼)과 함께 영국 Bell Educational Trust English Language School 에서 유학생활을 

하였다. 

유전이 발견되어 진주와 대추야자로 국가 수입을 마련하던 시절, 두바이는 새롭고 안정적인 수입으로 부를 축적해 나갈 수 있었다. 

17세의 나이로 고등 학업을 시작할 시대적으로도 딱 맞는 시기였으며 장남이 아님으로 국정운영에 대한 부담이 없는 상태였기에 그 의 유학생활은 가능하였다. 

이러한 학업 배경은 향후 쉐이크 모하메드가 두바이를 운영하는데 상당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두바이가 개방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 외자를 유치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두 번째로 세계자본이 두바이로 몰리기 시작하였다.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외국인에게  부동산 freehold 제도가 소개되기 시작한 2002년 9/11테러가 일어났다. 

9/11 테러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두바이였다. 

테러가 일어난 직후 미국 내에 있던 아랍계 자본 1,800억불이 중동으로 유입되었는 데 그 중 상당 부분이 두바이로 유입되었다. 

또한, 그 이듬해인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중동지역의 상당한 규모의 비즈니스가 두바이로 유입되었다. 

하루에 24만 배럴 밖에 생산하지 못하는 두바이에게 시대적으로 이러한 거대한 유동성 유입은 경제성장에 폭발적인 힘을 실어 주었다. 

   

환경적 배경도 두바이의 기적이 일어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그 중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1인 국정운영 시스템은 두바이의 통치시스템의 가장 핵심이다.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는데 "지도자의 비젼만 확실하다면"이라는 전제 조건이다. 

쉐이크 모하메드의 비젼만 확실하다면 반대세력이 없기 때문에 성장 고속도로를 장애물 없이 달릴 수 있다. 

   

두 번째로 두바이 토후국은 하나의 독립된 국가의 개변으로 운영된다. 

그렇기 때문에 통치자가 다스리는 토후국 이외에 따로 신경 쓸 부분이 줄어들고 제시해야 할 비전이 상대적으로 집중되어 있다. 

비교를 하자면 오세훈 서울시장이 운영해야 할 업무와 노무현 대통령이 운영해야 할 범위가 틀린것으로 보면된다. 

   

세 번째로 인구가 얼마 되지 않는다. 

중동전문 웹사이트인 두바이코리아에 의하면 UAE 전체 인구는 약 4백만명. 

두바이 토후국 인구는 약 140만명 밖에 안되며 그 인구중 자국민 비율은 20% 밖에 안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UAE 전체 자국민 80만명, 두바이 작구민 28만명을 이끌어 가는 것이 얼마나 쉽겠는가? 

이들에게 모든 복지를 완벽하게 제공함으로써 두바이 통치자는 그들의 믿음을 지원 받는다. 

   

네 번째로 지정학적인 위치가 매우 적절하다. 

유럽과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유가 행진으로 돈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인구 21억, (GDP기준으로) 1조 8천억 불 규모 (MENA 지역)의 거대시장을 총괄하는 본부로 포지셔닝하였다. 

이러한 지정학적인 위치와 함께 정치적인 안정과 비과세 정책으로 세계 굴지의 기업과 자본을 끌어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마지막으로 두바이는 산유국이다. 

사실 두바이가 산유국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 조차도 부끄럽다. 

하지만 두바이가 산유국이라는 점이 두바이 개발의 또 다른 중요한 변수가 된다. 

산유국이라는 점을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이유는 두바이의 석유 수출이 개발 초창기에는 상당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UAE 중앙정부에 따르면 두바이의 석유 매장량은 20년 뒤에 소진 될 것이라고 한다. 

두바이가 하루에 생산하는 석유는 24만 배럴이다. 

2007년 9월 13일자 두바이유 종가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는 약 170억 불이다. 

많다고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비교대상인 UAE 수도 아부다비의 하루 생산 규모인 1억 8천 7백억불의 1/12 수준이다. 

비과세 정책으로 재정수입이 전혀 없는 나라에서 석유 생산을 통해 들어오는 수입은 두바이가 비과세 정책을 초기에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요소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성장모델 가능할까? 

우리나라에서 두바이 리더숩에 대한 관심을 보이면서 상당히 많은 기사와 논문이 쓰여졌다. 

특히  정계에서 두바이 모델을 벤치마킹하면서 두바이의 성장 원동력을 한국식으로 적용하자는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 

하지만 두바이의 성장모델을 그대로 적용하자는 생각은 말도 안되는 생각이다. 

본질적으로 변경할 수 없는 환경(두바이는 산유국이라는 점, 인구규모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바의 성장모델을 통하여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부분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 

 큰 비전을 갖자! 

우라나라 사람들은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싸우는 경향이 있다. 

금융권을 예로 들어보자. 

외환위기 이후 국내 은행들은 막대한 공적자금이 투입되고 뼈를 깎는 합병의 과정을 겪으면서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부동산 열기가 일어나면서 제살깎기의 금리 인하 경쟁을 펼치면서 덩치는 커졌지만 덩치에 비해 상대적으로 손익은 늘지 않았다. 

이렇게 우리나라 제 1금융권들이 서로 집안에서 싸우는 동안 외국계 금융 기관들은 집 밖 중동에서 막대한 유동성을 흡수하고 있었다. 

바로 옆집인 일본만 보더라도 이슬람 금융에 대한 집중 투자로 중동지역에서 상당한 성과를 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냄비 기질일 수도 있겠지만 당장의 성과를 중요시 하는 문화도 바꾸어야 한다. 

전략적인 비전을 갖고 투자를 통해서 장기적인 목표를 수립한다면 단순히 1,2년 짜리 수익모델이 아니라 10년 짜리 수익모델을 만들 수 있다. 

상상력을 발휘해라! 

상상은 의지보다 강하다. 

성공을 원한다면 상상을 하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원하는 만큼만 얻기 때문에 대충대충 상상을 한다면 그 정도 밖에는 이루어내지 못한다.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상상의 틀을 깬다면 성취감에 대한 확신과 비전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수립이 가능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들 머리 속에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요령만 생기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봐 왔듯이 역사의 발전은 언제나 상상력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혁신적인 생각이야 말로 고부가가치 수익모델의 원천이다. 

사막 위에 세워진 세계 최고층 빌딩, 바다 위에 떠 있는 세계섬. 

사막 한 가운데서 즐기는 스키장만 보아도 두바이의 혁신적인 리더쉽이 상상력에서 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훌륭한 리더쉽을 가진 인재가 필요하다! 

두바이 성장 모델을 단순하게 비교해보자. 

두바이를 이끄는 리더는 쉐이크 모하메드지만 최하 단계에서 실행을 하는 인력은 저임금 노동력이다. 

워런 버펫의 경영 철학인 "act like an owner" 와는 상반된 개념이다. 

물론 분야는 다르지만 쉐이크 모하메드의 철학은 확실한 리더쉽으로 조직을 이끄는 것이다. 

조금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탁월한 리더쉽만 있다면 그 리더쉽 아래 어떠한 사람이 있더라도 

그 조직은 성공적으로 돌아가는 사실을 직접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그의 리더쉽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우리나라 기업의 "세계 1등 글로벌 기업 달성"이라는 식상한 문구와는 다르게 그의 "Dubai Strategic Plan 2015" ("두바이 전략계획 2015")를 읽어보면 경제개발, 사회개발, 인프라, 국토 환경, 안보, 정부운영 방침을 세부적으로 설정하고 그 비전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나라 국정을 운영하는 대통령, 기업의 총수, 심지어는 개인사업장을 운영하는 사업자도 이러한 리더쉽을 배워야 한다. 

리더쉽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한 자기계발을 통하여 큰 비전을 전략적으로 수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 우리나라, 우리기업에도 필요한 시점이다. 

- 우리은행 지역전문가  심태용   

 

   

               

   

     

                한국을 방문한 모하메드

                  

                         둘째 부인 하야공주와 함께 (Princess Haya) 

        

   

    

        축구경기 관람 (양복입은 사람은 제프 블래터 FIFA 회장)

   

    

   

           

                  케피아를 벗은 모하메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접견

   

   

 모하메드의 (둘째 부인 '하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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